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원정 (문단 편집) == [[대육군]]의 대몰락 == 나폴레옹은 후퇴하기로 한 날에 또 한 번 놀라게 되는데 군대의 어마어마한 짐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의 모든 짐마차를 동원해 (물론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많이 챙기긴 했지만) 일개 졸병까지 금붙이[* 러시아 원정시에 위조지폐를 엄청나게 뿌린 탓에 은화 값이 폭락해서 은붙이는 잘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금붙이를 챙겼던 사람들은 나중에 리투아니아로 퇴각한 후 방세를 낼 수 있어 살았고, 안 챙겼던 사람들이 밖에서 동사했다. 왜냐면 당시 유럽의 방세는 무조건 하룻밤에 금화 1닢(2024년 한화로 대략 75,000원)이었을 정도로 비쌋기 때문이다.], 사치품, 예술품들을 산더미처럼 들고 왔으니 행군 대열이 아니라 이삿짐 대열이었다. 군기가 이토록 개판이 되었지만 나폴레옹은 >"마차가 많으니 부상병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며 애써 정신승리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부상병들을 차마 버리고 갈 순 없어서 마차에 태우도록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문제는 마차를 담당하는 프랑스군 병사들이 부상병을 태우려면 자신들의 약탈품을 버려야 했으므로 큰 불만을 가졌기에, 일부러 마차를 거칠게 몰아 부상병들이 떨어져 죽게 하는 등 인간으로서의 의의도 저버리는 행동을 일삼았다. 떨어진 부상병들은 다음 마차 수레바퀴에 깔려죽거나 아니면 길가에서 얼어죽었다.] 4주 간의 모스크바 생활 동안 병력은 저희끼리 죽이고 이탈하며, 약탈하러 나가느라 90,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10월 24일 마로야로슬라베트에서 일어난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는 나폴레옹군이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쿠투조프는 공격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황제랑 주전파와 젊은 장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공격한 것이었다. 물론 의도치는 않았지만 러시아는 이것으로 나폴레옹군을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퇴각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스몰렌스크 방면은 이미 양군의 격전으로 초토화된 후라 현지 보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해 남쪽의 칼루가와 툴라 방향으로 퇴각하지 않은 게 나폴레옹의 실책이라는 의견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 갈린다. 구체적으로 칼루가와 툴라 방향은 빌나-스몰렌스크-모스크바 라인처럼 초토화를 당하지 않아서 식량이 있는 데다가 툴라에는 대포 공장을 비롯해서 러시아군의 기지창이 있었는데, 병력이 더 소모되기 전에 일전을 벌였어야 된다는 의견과 이미 군기와 전투력이 소모된데다가 러시아군이 허수아비도 아니니 무리였다는 의견이 갈린 것이다.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로 우회한 이유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의견이 분분한데, 10월 25일에 카자크 연대에게 거의 잡힐 뻔했다가 척탄병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나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던 것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하술한 대로 나폴레옹이 자살용 독약을 가지고 다녔던 건 25일의 카자크 연대의 공격 이후였다. 한편 러시아군의 총사령관 쿠투조프는 추격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나폴레옹 군대 10명을 잡고자 러시아군 한 명을 상하게 하지 않을 것, 둘째는 나폴레옹을 러시아 국경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이에 공명심에 부풀었던 젊은 장교들은 쿠투조프를 겁 많은 노인이라고 욕하며 불만을 가졌다. 신중한 정도가 지나쳐서 쿠투조프가 나폴레옹을 전멸시킬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는 비판도 있으나 나폴레옹을 뒤쫓는 병력도 고생을 하며 손실이 심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나폴레옹군도 신속하게 후퇴했어야 하는데 앞선 짐들이 너무 많아 퇴각 속도가 느려져서 러시아군에게 따라 잡히고 말았다. 이를 견제해야 할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이미 극심하게 소모된 데다가[* 보로디노 전투 이후 뮈라에게 쿠투조프를 추격하라고 또 기병을 쓴 점도 컸다.] 지독한 식량난으로 말을 잡아 먹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게다가 말이 없는 탓에 다량의 대포와 수송차들이 버려졌다. 이는 나폴레옹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포병대의 붕괴로 이어져 나폴레옹 몰락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네 장군의 3군단 기병 병력은 사실상 전멸했고 뮈라의 병력도 겨우 수천 명으로 감소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군과 붙으면 보병 대 보병으로는 우위였지만 적을 추격섬멸할 기병과 화력 지원을 해줄 대포가 없어서 그저 쫒아내는게 전부였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탈주병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탈주병들은 잡혀서 포로가 되도 사는 걸 장담하기 어려웠다. 잔뜩 뿔이 나 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붙잡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 죽거나, 병 걸려 죽거나, 운 좋게 포로로 잡히더라도 러시아군은 포로들을 먹여살릴 의도도 능력도 없었다. 관대하게 봐주어도 포로 중에 절반 이하만 생존했다고 전해진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거냐면, 근현대사에서 가장 포로 학대가 심한 군대 중 하나였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 사망률이 40.4%였는데 그것을 (그것도 '''관대하게 봐주었다는 것이''')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독일군 포로 사망률은 최대치가 57.5%이다.] 프랑스군의 병력은 갈수록 줄어들어 11월 8일 스몰렌스크에 겨우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는 60,000명까지 줄어들었고, 무장한 병력은 40,000명에 불과했다. 쿠투조프의 판단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나폴레옹군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짝 뒤쫓기만 해도 말고기에 화약을 뿌려먹다가 알아서 병들거나[* 화약의 질산칼륨 성분 때문에 소금간 대신 쳐서 먹었다고 한다. 물론 이 정도까지 가면 막장이다. 러시아 경기병대의 구호는 "적에게 말고기를 먹이자'였다고.], 굶어 죽든가, 농가를 약탈하며 흩어지든가, 카자크에게 목과 약탈품을 조공으로 바치든가의 선택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를 묘사한 참전 생존자들의 회고록들을 보면. * 다섯 명의 프랑스 병사가 꽁꽁 언 말 다리 하나를 두고 개처럼 싸운다. * 말 담요, 여자 치마, 반쯤 마른 짐승가죽, 넝마를 몸에 걸치고 신발 대신 양가죽, 천조각을 발에 감았다. * 때와 연기에 시커멓게 절어 얼음 위를 행군하다 누가 지쳐 쓰러지면 그 사람이 죽기도 전에 다른 병사들에게 몸에 걸친 것들이 모두 벗겨지고 눈밭에 내버려졌다. * 황제 근위병이 아직 죽지 않아 저항하는 자기 동료의 입은 것을 강제로 빼앗아 입는다. * 한 무리의 병사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교회에서 이미 들어가 쉬던 다른 병사들을 총검으로 내쫓아 길가에서 얼어 죽게 만들었다. * 동료의 사체를 깔고 앉아 무심하게 불을 쬐었다. * 수백 명의 프랑스 병사가 빼곡히 들어찬 헛간에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자, 병사들이 불타는 헛간에 모여들어 안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아우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녹인다. * [[식인]]을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게 보고되었다. ...와 같은 전우애는커녕, 인간성마저 다 내다버린 듯한 광경이 벌어졌었다.[* 유발 하라리. 《극한의 경험》, 옥당, 2017, 434~7p.] 그래도 상당수의 병사들, 특히 네나 다부 같은 명장들이 지휘하는 군단은 어느 정도 군율을 유지하고 군대답게 행군을 했다. 특히 각자 살아남으려는 병사들은 얼마 못가 죽었지만 작은 빵조각이라도 나눠먹는 전우애를 가진 병사들은 꽁꽁 뭉쳐서 생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11월 6일, 나폴레옹은 본토에서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장군이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사실 뒈졌음"이란 명분으로 10월 23일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보고받았다. 11월 28일, [[드네프르 강]]의 지류인 베레지나 강을 건너기 위해 나폴레옹군이 [[부교|배다리]]를 놓자, 쿠투조프는 이때가 결정타를 먹일 때라 판단하고 미리 도하시킨 별동대와 협공하여 나폴레옹군을 급습했다('''베레지나 강 전투'''). 이 전투에서 후위를 맡은 [[클로드 빅토르]]는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도하시키려고 동분서주하며 사력을 다했으나 모든 병력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먼저 도하한 장군들과 병사들은, 강 건너편에 남겨진 수많은 전우들이 구원을 애걸하다가 끝내 도륙당하는 처참한 광경과 끔찍한 비명을 모두 생생하게 보고 들어야만 했다.[* 그레고리 프리몬-반즈, 토드 피셔, 《나폴레옹 전쟁 - 근대 유럽의 탄생》, 플래닛 미디어, 2009.] 이 전투로 인해 러시아 원정에서의 나폴레옹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조아킴 뮈라]]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나 뮈라는 자신의 영지인 [[나폴리 왕국]]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잔존 부대를 떠넘기고 탈주해 버렸다(...). 12월 7일부터 9일까지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찾아왔고 들판에서 노숙하던 병력들은 상당수 얼어죽었다.[* 이 1주일간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추위와 강풍이 몰아쳤다. 당시 참전용사들의 회고록에는 공통적으로 '얼음조각이 공기 속에 섞여서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12월 7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 도착한 대육군 병력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릴 수 있었지만 카자크 척후병들이 나타나자 이틀 뒤인 12월 9일, 다시 서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빌뉴스 정도의 도시였다면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지만 지휘관이 사라진 대육군은 사실상 통제되지 않는 오합지졸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병력들은 리투아니아와 프로이센의 국경인 네만 강(Neman River)에 도달했다. 이때 대육군의 최후미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미셸 네 원수였다.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내뺀 뮈라와 달리 네는 책임감 있게 후위대 역할을 수행하며 한명의 아군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코브노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쳤다. 기병대는 진즉에 전멸했으므로 '''미셸 네 원수조차 머스킷을 들고''' 방진에 섞여 사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2월 14일, 마침내 모든 병사들이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확신하자 네 원수는 머스킷을 마지막으로 한 발 사격한 뒤 강에 집어 던지고 유유히 뒤를 돌아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넜다. 이 일화로 인해 네 원수는 '러시아를 떠난 마지막 프랑스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술된 극한의 경험들이 네에게 상당히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이후 벌어지는 전역들(대표적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충동적인 실수를 자주 저지르게 된다.] 나폴레옹이 >"우리를 파멸시킨 것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날씨의 희생양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러시아에 다녀온 프랑스 병사들이 "러시아의 추위는 혹독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의심없이 믿어왔다. 그런데 1960년대 핀란드의 기상학자였던 J. M. Angervo 박사가 1812년 러시아의 초겨울은 평소보다 따듯했다며 대략 화씨 35도에서 45도, 즉 영상 1.5도에서 7도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뉴욕대 교수였던 Leo Gershoy에게 즉각 반박을 받았다. 왜냐하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수기에서 10월 27일 영하 5도로 떨어지는 등 양쪽에서 강추위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교차 검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의 추위는 양측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론도 없었다. 또 다른 의견으로 프랑스군이 패퇴한 것은 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이지, 기후적 요인이 아니다라는 의견이다. 왜냐하면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이 양쪽에서 얼어죽으면서도 군기를 유지하고 전투를 잘 벌였다는 근거에 기반해서이다. 11월 3일 쯤 첫 눈이 내리며 기온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영하 10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이 온도도 여름옷을 입고 행군하는 병력에게는 충격이어서 눈이 몸에 내리면 신발과 옷이 그대로 얼고 녹고 하면서 감기 등에 걸릴수 있었다. 당시 종군했던 프랑스군의 군의관 Louis Vivant Lagneau에 의하면 11월 9일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15도까지 떨어졌다.. 11월 14일에는 영하 28도를 찍었는데 이미 이정도면 보급도 끊어지면서 대량으로 낙오와 동사가 발생했다. 나폴레옹이 11월 30일에 플레슈체니체에 도착했을 때 -30도 , 12월 5일 나폴레옹의 마차의 와인이 얼어터질 때는 -35도, 다음날 12월 6일 -37.5도를 찍고 12월 9일 빌뉴스에 도착할 때 쯤 -35도로 약간 따듯해졌다고 한다. 애초에 프랑스군 측에서는 추위의 원인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러시아군에서는 자기들이 군사적으로 잘 싸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날씨에 의한 원인을 평가 절하하는 면이 있다는 점이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현재 날씨 추정이나 당시 수기에서도 양군에서 날씨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겪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의 참패는 나폴레옹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었는데 모스크바 원정 병력의 경우, 본대 병력은 거의 전멸했고 말 200,000마리와 대포 1,000여 문을 잃었으며 아주 소중한 [[기병]]대와 [[포병]]대는 괴멸했다. 나폴레옹은 이후 신기에 가까운 행정능력과 카리스마로 빠른 시간 내에 많은 병력을 복구(400,000명 이상)했지만, 어떻게든 머릿수를 채울 수 있었던 보병 및 포병과 달리 잘 훈련된 말과 숙련된 기수가 핵심인 '''기병 전력은 [[나폴레옹 전쟁]] 끝까지''' 예전의 전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손실은 꼼꼼하고 빠른 정찰과 재빠른 예비대 투입을 장기로 삼았던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마이너스가 되어 이후의 모든 전역, 특히 마지막의 [[워털루 전투]]에 이르기까지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게 된다. 즉, 나폴레옹이 1808~15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250,000명을 잃긴 했지만 진짜 전력을 임팩트있게 제대로 날려먹은 건 러시아 원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나폴레옹에게 당한 동맹국에게는 둘도 없는 큰 기회가 되었다. 다만 60만 대군 중에서 앞서 국경을 건넌 건 420,000명이고 본대와 모스크바로 향한 병력은 350,000명 정도이다. 또한 러시아 국경을 넘어 도망친 병력은 9~120,000명 정도로 추산한다.(자세한 내용은 수정 바람) 여기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병력 4~50,000여 명이 포함되고, 포로로 잡혔다가 나중에 살아난 병력을 감안하면 몽땅 러시아에서 죽은 건 아니다. 물론 본대 중에 80% 이상 집에 못 돌아간 건 맞다. 겨울철이 겹치고 기후가 혹독했기 때문에 특히 비전투 손실이 양군 모두 컸는데 러시아군도 주력인 1전선군이 120,000명에서 30,000명 또는 50,000명까지 감소했고, 결국엔 1, 2전선군을 합쳐버렸다.[* 그 덕에 바클라이 드 톨리는 자연스레(?) 경질되어 1813년 러시아군 총사령관 비트겐슈타인이 삽질로 인해 알렉산드르 1세가 경질하기 전까지 백수 신세였다.] 벨로루시에 짱박혀서 산책만 하다 돌아간 오스트리아군마저 33,000명 중 20,000명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지경이었다. 러시아군 총 손실은 모두 합쳐 21~25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